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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 조각상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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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상징적인 언론사 워싱턴 포스트 사옥 건물 앞에는 동상이 하나 있다.

역사적으로 이 동상은 DC의 조경 발전과 DC의 상징적 조각물의 하나가 되는데 기여했는데 다름 아닌 벤저민 프랭클린 동상이다.  


워싱턴 DC의 멋진 조각상의 하나인 벤저민 프랭클린 동상은 12th St.과 Pennsylvania Avenue NW 남동쪽에 있다. 


프랭클린은 그의 왼손에 서류뭉치를 들고 마치 정책 견해를 논하는 것처럼 몸짓으로 권리를 표현하고 있다. 동상은 길을 직면하고 서있는데 그의 등 뒤로는 현재 트럼프 호텔이 점령하고 있는 원래 우체국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동상 아래에는 11 피트 크기의 화강암 받침대가 사면에 각각 한 개씩 있고 철학자 언론인 박애주의자 애국자 라고 각각 새겨져 있다.


그러나 프랭클린 동상은 원래 여기에 있을 운명이 아니었다. 구 우체국 건물이 1899년에 완공 될 즈음, 동상은 다른 위치에 이미 10년 동안 세워져 있었다.


동상 기증자

스틸슨 허친스(Stilson Hutchins)는 신문 기자였다. 

허친스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기자 일을 시작한 후 워싱턴으로 옮겨 1877년 워싱턴 포스트를 설립했다. 3년 후 허친스는 워싱턴 포스트를 북동쪽 코너인 10 st. 와 D Street NW에 대규모로 새롭게 건물을 지었다.


허친스가 워싱턴 포스트 밖의 거리 풍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1885년의 일이다.

그의 아내 새리타가 출산 중 35세에 사망했는데 이때 허친스는 10 번가 동쪽에 분수대를 설치했다. 허친스와 같이 새리타는 지역사회의 지도자였는데 분수대에는 말을 위한 곡면 물받이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별도의 식수대가 조성됐다.


허친스는 DC에서의 그의 입지와 의심할 여지없이 경쟁 신문이던 이브닝스타를 한 번에 제압하기 위해 포스트 빌딩에 인접한 11번 웨스트와 짧은 펜실베이니아 블록의 공공 장소에 눈에 띄는 외부 인테리어 조성을 계속했다.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 동상을 이 지역에 가져 오기 위해 기부 행사를 고안했다. 그가 제안한 위치는 10번가와 D St. 그리고 펜실베니아 에비뉴의 교차로에서 워싱턴 포스트 바깥쪽의 작은 삼각형 구역이다.


여러 미술가들

독일 태생의 조각가 언스트 플라스먼(Ernst Plassman)은 1872년 뉴욕 시의 독일어 신문사 스타아츠-짜이퉁 본사 건물이 있는 프린팅 하우스 스퀘어와 파크 하우스에 세워진 자신이 디자인한 프랭클린 동상의 모형을 자세히 모델링했다. 


그러나 워싱턴에 세우기 위해 계획된 동상의 집행은 다른 예술가인 자크 주브널 (Jacques Jouvenal)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플라스먼 처럼 독일에서 태어난 주브널은 프랑스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친 유제노 프로테스탄트(Huguenot Protestants)의 후손이었다. 


1853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주브널은 1855년 DC로 와서 국회의사당 건물 기둥의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아들 루돌프는 아버지의 조각품과 석판 절단 작업을 통해 조각 훈련을 받았는데 나중에 워싱턴 기념비의 오벨리스크 캡스턴 절단 작업을 책임지는 영예를 받았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주브널은 허친스가 새로운 워싱턴 포스트 건물을 건축할 때까지 같은 장소에서 1880년까지 조각상 작업실을 941 D Street NW에서 운영했다. 1881년 이 작업장을 11th New York Avenue로 이전했다.

5년이 지난 1889년 1 월 17 일에 8 1/2피트 높이의 대리석 절단 작업이 마무리 되었다고 공식 발표됐다. 당연히, 워싱턴 포스트는 호평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동상이 허식이나 장식 없다고 평가했는데 허치슨 씨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많은 제안을 거절했다고 평했다.


워싱턴의 공공 상징물

처음에 프랭클린의 동상은 작은 원형의 교통 순환로인 일명 서클에 있었다.

1909 년까지 프랭클린 동상 주변에 큰 삼각형 플라자를 건설하여보다 규칙적인 패턴으로 교통 흐름을 유도했다.


프랭클린 동상은 지역의 상징으로서 공공 기념물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여러 해 동안 시민, 종교 그리고 정치 단체들이 다양한 공개 행사를 위해 프랭클린 동상 광장을 사용했다. 구세군은 정기적인 회의를 열고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참정권주의자 “순례자"들은 한달 동안 왜건을 타고 메릴랜드 전역을 돌아 다니며 선도를 한 후 여기에 모였다. 1920년에는 세계 군축을 위한 집회를 개최했다.


프랭클린 탄생기념일인1월 17일에는 프랭클린이 세운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전문 지식인들과 졸업생들에 의해 화환 마련 행사가 열리는데 지금은 인기 있는 행사가 되었다.


또한 1914년에 투자자들은 10th St. 맞은편의 D St.과 남쪽의 펜실베니아 에비뉴로 묶인 슬라이버 블록에 걸쳐 있는 기존 은행 건물을 인수하고 프랭클린 내쇼널 은행(Franklin National Bank)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1921년부터 1월 17일 화환 행사에 공식 참여하면서 연례 자선주간 행사를 개최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21년과 1929년 두 차례에 걸쳐 동상이 철거되어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문제는 DC 지역의 다른 모든 기념탑이 연방 정부 소유로 일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DC 지방 정부에는 동상을 관리하기 위한 자금이나 인력이 없었다.


펜실베니아 에비뉴의 쇠퇴와 변화

1960년대 중반 펜실베니아 에비뉴는 대규모 변화의 위기에 처했다. 

수도의 주요 대로를 따라 도시의 황폐화가 진행됨에 따라 케네디 대통령의 우려로 인해 집행부는 이 도로에 대한 수많은 연구를 실시하고 의회가 수용할 수 있는 보존과 재개발 계획을 찾는데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1965년에는 워싱턴 포스트의 옛 건물이 있던 자리를 포함한 펜실베니아 에비뉴와 10번가에서 11번가까지의 블록에 있는 모든 건물들이 새로운 FBI 본부 건설을 위해 철거되었다. 


더 큰 변화는 DC 공무원들이 도시의 몇 안 되는 말의 물 급식소를 없애기 시작했을 때 일어났다. 위생 담당 공무원들은 1966년 후반 마침내 허친스가 조성했던 분수대를 철거했다.


1973년 펜실베니아 에비뉴 개발 공사(PADC)가 설립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경상의 이유로 프랭클린 조각상을 옮기는 것에 대한 안건이 논의되었다. 1년이 채 되지 않아 D St.와10th. 서쪽 방향을 막고 플라자를 크게 하고 보도를 넓히기로 하고 조각상도 옮기는 것으로 결정했다. 

현재 자리로의 최종 이전 조치는 1980 년에 실행됐다. 


옛 우정본부 빌딩 앞으로 결정한 것은 미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프랭클린이 초대 미국 우정국장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프랭클린 조각상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되었지만 프랭클린 동상 아래에 새겨진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것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열심히 일하고 과학적 탐구와 재정적 신중함, 사려 깊은 국제 외교와 종교적 관용과 같은 그가 구현한 원칙은 상기시킬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의 동상을 후원하고 만든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한번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프랭클린 조각상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자유 언론의 중심 역할을 해준다. 


미국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의 끊임없이 이어온 공헌과 박애는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기억해야 할 문화적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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