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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알래스카를 판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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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50년 전인 1867년 3월30일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세워드와 러시아 전권 특사 배론 에도우드 드 스토에클 사이에 영토 양여조약(Treaty of Cession)이 조인됐다. 


미국은 당시 알래스카를 구입하기 위해 720만불(현재 달러가치 1억1,300만불)을 지불했는데, 알래스카의 유전 가치만 해도 4천억불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하나만 놓고서 미국이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 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국이 알래스카를 사지 않았다면 미국은 아마도 러시아 영토가 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미국 영토 탐험은 이미 16세기부터 시작됐으며, 1850년 캘리포니아주의 연방편입 훨씬 이전에  러시아 해군은 이미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포드 로스에 기지를 마련했었다. 


러시아는 1581년, 징기스칸의 손자가 통치하던 시베리아 왕국(Khanate of Sibir)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현재의 시베리아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조선왕조 효종 당시 임경업 장군의 나선 정벌과 중국-러시아 간 아무르 강 전쟁의 배경이 되던 시기였다. 


당시 러시아가 시베리아에서 유일하게 이익을 취하던 것은 ‘모피’였다. 

러시아 정교(Russian Orthodox Christian)는 교구 신부들의 인사적체 해소와 종교세 징수를 목적으로, 러시아 황실은 인두세 등 세금 징수 목적으로 시베리아 정착촌을 장려했으며 정착민들은 사냥을 통한 모피 수입에 의존했다. 


백두산 호랑이로 대표되는 한국호랑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형 고양이과 동물들은 이때 이미 멸종 위험에 처했었다.   


18세기 러시아는 현제로 불리던 피터대제(Peter the Great) 통치기를 맞아 근세초 중흥기를 맞는다. 

러시아는 처음으로 해군을 창설하고 시베리아 동쪽 태평양 너머로 탐험을 시작했다. 


1741년 러시아 해군 제독 비투스 베링(Vitus Bering)이 처음으로 알래스카 탐험에 성공하며 러시아 깃발을 꽂았다. 


베링은 탐험도중 괴혈병으로 사망했으나 시베리아와 알류산 열도(Aleutian Islands)를 따라 알래스카에 닿는 바다 베링해 이름을 얻었다. 

당시 첫 탐사로 러시아는 시베리아에서 고갈된 새로우 모피 수입원천을 얻었다. 

해달과 북극여우, 털물개 등의 모피를 지천에서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에스키모 원주민에게 사격술을 가르쳐 모피를 안정적으로 조달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의 모피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알래스카와 캐나다, 미국 서부 일대의 모피를 싹쓸이했다. 


당시는 미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기 전이기 때문에, 미국 서부 지배력은 매우 미미했었기에, 이 지역은 오히려 러시아 천하였다고 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이 지역 골드 러쉬는 러시아 모피상의 모피 루트를 그대로 답습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알래스카에 대한 지배욕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알래스카 양여 당시 알래스카에 거주하던 러시아은 800명 선에 불과했다. 


철도가 없었던 당시, 제정 러시아 수도인 상테르스부르크에서 알래스카에 닿으려면 지구 반바퀴를 돌아야 했다. 


러시아가 양여를 30년만 늦춰 전신과 철도를 갖춘 상황이었다면 알래스카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멀었고 농사를 짓기에도 어려운 동토였으며 기껏해야 모피 장사꾼의 배만 불려주고 세금 탈루가 만연한 땅이었기에 차라리 현금을 받고 미국에 넘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러시아가 스페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더라도 알래스카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캘리포니아주는 스페인 영토였다. 

알래스카 식민지를 개척한 러시아는 본국과의 교역에 시간과 돈이 훨씬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스페인 영토인 캘리포니아와의 교역을 꾀하며 1812년 캘리포니아주 포드 로스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하지만 이 정착촌 건설은 스페인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후 알래스카 유지관리에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었다. 


더군다나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주던 수달의 남획으로 인해 모피 수입이 급감한 것이 커다란 타격으로 되돌아왔다. 게다가 러시아는 유럽의 흑해 연안 크림반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전쟁비용 조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자, 미국의 현금 제안을 덥석 받아물고 말았던 것이다. 


1840년대 미국은 비로소 오레곤주 개척시기에 도달했다. 

텍사스주를 병합하고 캘리포니아주에서 스페인과 영토전쟁을 벌여 힘겹게 승리한 후 북쪽으로 눈

길을 돌렸던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에 막혀 더 이상 육로 개척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자, 미지의 땅이었던 북극해 연안으로 개척 루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남북전쟁 직전의 일로,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진출할 야망과 함께 북극 개척의 꿈을 꾸고 있었는데, 남북전쟁으로 태평양 진출 꿈은 다소 늦춰졌으나 북극 꿈은 계속 진행됐던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미국은 알래스카에서 모피 수입보다는 금광 수입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미국이 중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서라도 접근 거리를 줄일 목적으로도 알래스카는 매우 긴요했다. 


미국이 알래스카를 병합한 후 캘리포니아주 해군 기지 시설을 알래스카로 옮겼었다. 

알래스카 댓가는 원래 4천만불에서 시작됐으나 720만불까지 내려갔다. 

3억7천만 에이커의 광대한 자연은 유럽연합 EU 국가 면적의 1/3에 달한다. 


이중 2억2천만 에이커는 연방정부 소유로, 이 안에 어떤 진귀한 자원이 매장돼 있는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알래스카는 막대한 재원을 바탕으로 판매세와 소득세 모두를 부과하지 않는 유일한 주로,  모든 주민들에게 원유 판매이익의 일부를 보조금 용돈으로 지급한다. 


양 대국간 거래로 인한 합병과 개척의 과정 속에 알래스카 원주민은 수탈과 학살의 역사로 점철됐다. 1741년 러시아의 알래스카 합병당시 알래스카 일대에는 12만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1867년 미국으로 양여될 때 인구는 5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미국은 1924년 인디언 시민권법(Indian Citizenship Act)을 제정할 때까지 원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으며, 본토에서 파견된 군 사령관이 원주민을 적국의 포로 쯤으로 대접했다. 


1945년 인디언차별금지법(Anti-Discrimination Act)에 제정되고 나서야, “개와 원주인 출입금지(No Dogs or Natives Allowed)”같은 싸인판을 철거할 수 있었다. 


1959년 아이젠하워 행정부 당시 알래스카는 미국의 50번째주로 승격됐으나, 인디언 차별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은 1960년대 원주민에 대한 사회복지 혜택을 강화해, 알래스카 원주민 숫자가 1971년 닉슨 행정부 당시 7만5천명까지 증가하고, 현재는 12만명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나 대부분 러시아와 미국 백인 혈통 DNA를 30% 이상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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