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민

18년 전 미국인의 대학 생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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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에 과거 대학 생활을 하면서 오늘날의 교육 현실과 대비한 칼럼이 실렸다. 2004년에 대학을 입학한 밀레니얼 세대의 대학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8년 전 대학 신입생

대학교 1학년 첫 학기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에 그 때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늘 극도로 피곤했고 매일 아침 3시 40분에 알람 시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이어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서 시계 속 형광 숫자 3:40을 보다, 잠이 덜 깬 채 본능적으로 알람 버튼을 끄고,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빠져나와 곧장 문으로 향한다. 


전날 밤 잠들 때 나갈 옷을 미리 입고 잠들기 때문에 잘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문을 나선다. 덕분에 3시 30분이 아니라 3시 40분까지 10분 더 잘 수 있었다.

로키산맥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공과대학 건물로 향한다. 


새벽 경비와 청소 일을 하기 위해 아침 4시부터 건물 안의 작은 나일론 카펫에 붙은 껌을 떼어내거나 칠판에 써 있는 복잡한 수식들을 지우고, 화장실 변기를 청소하는 게 매일의 일이었다.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아침 8시쯤 됐고 그때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을 갔다.


대학교 신입생 첫 두 달간 하루 일과는 늘 이렇게 시작됐으나 새벽에 경비 일만 해서는 집세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학교 구내식당에서 콜스로우와 젤리를 서빙하는 일이었다. 

같이 일했던 동료도 같은 1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돈을 낼 수 없어 일을 했다. 


주문을 받고 파는 음식을 정작 사 먹을 돈이 없다는 씁쓸한 사실을 서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알고 있었다. 

일하다 주어지는 점심시간에 앞치마를 걸어 두고 가방 속에서 미리 싸 온 점심을 꺼내 먹었다. 

단백질 바 하나와 동네 슈퍼에서 개당 10센트에 살 수 있는 라면이었다. 매일 같은 메뉴였지만, 그렇다고 질리거나 화가 난 적은 없었던 듯하다. 


같은 학년 학생들, 친구들이 먹은 음식이 담긴 접시를 씻거나, 그들이 사용한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해서 딱히 창피하거나 모멸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가난, 불평등에 관해서 무언가 복잡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기억에 가장 남은 것은 너무 피곤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피곤한 몸 그리고 가난

아이다호 주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부모가 독실한 몰몬교로, 정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정규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출생 신고도 아홉 살이 됐을 때 뒤늦게 했고 브리검영 대학 강의실이 태어나 처음 접하는 학교 수업이었다. 


여름방학 때 아이다호 집에 오면 읍내 슈퍼마켓에서 시급 5.35 달러를 받고 장 본 물품을 담아주는 일을 했다. 

1년 학비와 생활비가 3,000 달러 정도 들던 시절이다. 


그 돈을 벌려고 여름 내내 “종이, 비닐 봉지 중 어디에 담아드릴까요? (paper or plastic?)” 이 말을 수천 번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부모가 정규 학교를 보낸 적이 없었으나 대학교는 스스로의 의지로 갔으니, 학비나 생활비를 보태 줄 것이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같이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 같이 공부하고 과제를 하는 생활 자체도 한없이 낯선 일이었다. 

늘 피곤했던 기억을 제외하면, 대학 생활을 관통하는 경험은 가난이었다. 


무척 가난했던 학생이었기에 늘 한없이 부족했던 돈과 자원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뽑아내려 했다. 학점은 당연히 꽉꽉 채워서 들었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낼 수 있을지 늘 걱정하며 지냈으니,

 비싼 돈 주고 다니는 학교에서 수업을 여유롭게 듣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하나만으로는 부족했기에 두 번째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고, 야간이든 새벽이든 시급이 높은 시간대가 있으면 무조건 그 시간을 골랐다. 


잔디 깎기는 물론이고, 낙엽이든 눈이든 계절 따라 적은 돈이라도 받고 치워야 할 게 생기면 무조건 치웠다. 얼마를 주는지 묻지도 않았다. 아르바이트할 때마다 했던 질문은 딱 하나, 돈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뿐이었다.


신입생 때 삶을 지배한 건 돈이었다. 부족한 돈을 메울 궁리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매일 아침 3시 40분에 일어나야 했던 것도 밤 근무는 시급이 6.35 달러로 낮 근무보다 1 달러 더 비쌌기 때문이다. 자정까지 음악을 크게 틀어 놓는 룸메이트 덕분에 하루에 3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자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잠이 부족하니 강의 시간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지만, 상관없었다. 

겨우내 잔기침을 달고 살면서 코는 축농증으로 늘 막혔지만, 1 달러나 더 주는데 그걸 왜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대학 선택은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대학 생활은 2학년 때 순식간에 끝장날 뻔했다. 어느 날 턱이 너무 아파서 치과에 갔더니, 이가 썩어 신경까지 건드리게 됐다며 당장 신경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1,600 달러나 드는 치료비였다. 그렇게 큰돈을 구할 길도 막막했지만, 학교는 당장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장거리 트럭 운전을 하는 오빠가 거처로 사용하는 트레일러에서 몇 달 정도 지내면서 버거 가게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볼 생각을 했다.


장학금 펠 그랜트

몰몬교에서 세운 브리검영 대학교를 다녔고 대부분 학생이 몰몬교 신자였다. 학교엔 종교적인 고민을 포함해 대학 생활에 관한 여러 문제를 상담해주는 비숍이 있었다. 


비숍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자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라면서 펠 그랜트 (Pell Grant)라는 연방정부 장학금에 대해 알려줬다. 

처음엔 뭔 지 몰라 두려움에 완강히 거부했지만, 끝내 비숍의 설득에 신청했고, 며칠 뒤 4,000 달러가 적힌 수표가 도착했다. 


생전 본 적도 만져 본적도 없는 큰 돈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일주일 동안 수표를 그냥 모셔 놨다. 그렇게 많은 돈을 소유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다 치통이 다시 도졌고 어쩔 수 없이 은행에 가서 4,000 달러를 현금으로 바꿨다. 바로 신경 치료를 받았고, 등록금도 낼 수 있었다. 입학한 뒤 처음으로 수업 시간에 필요한 교과서도 샀다. 

그렇게 하고도 1천 달러 넘는 돈이 남았다. 그래서 학교 구내식당 아르바이트는 그만뒀고, 공과대학 청소 일도 밤 근무 대신 낮 근무로 바꿨다. 


더는 수업 시간에 졸지 않았고 잔기침은 멎었고, 축농증도 나았다.

정부에서 받은 장학금 4,000 달러를 현금으로 바꾼 그 날은 비로소 진짜 대학생이 된 날이기도 하다. 


장학금 덕분에 수중에 있는 돈으로 앞으로 며칠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게 됐고, 처음으로 강의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부자가 되기엔 부족한 액수였지만 당시 무엇보다 필요했던 기본적인 것을 충당하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생활이 안정되고 나니, 그제야 대학생이자 성인으로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 지 스스로 묻게 됐다. 

뭘 하거나 생각할 때 좋았는지, 무엇을 잘했는지 진중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교과서나 필독서 외에 다른 책을 볼 여유가 생겼고, 필수 과목이 아닌 수업 중 그저 재미있어 보이거나 궁금해서 선택하는 수업도 생겼다. 


그 순간부터 내린 모든 결정은 장학금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1 달러를 더 벌려고 하루 수면 시간을 몇 시간씩 줄였던 시절에 수천 달러는 젊은 청춘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귀중한 일이 무엇인지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돈이 있어야 돈과 상관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이 생겼다. 돈에 얽매이지 않게 되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대학 교육과 차이

당시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간절히 원하는 일이라면 해볼 여지가 얼마든지 있던 시절이다. 둘러쌌던 조건과 환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004년에 브리검영 대학교에 들어갔고 몰몬교 교회가 상당한 금액을 지원하기 때문에 사립대학이지만, 한 학기 등록금이 1,640달러로 매우 쌌다. 


2008년 시작된 신용위기가 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룸메이트가 있는 낡은 아파트를 월세 190 달러에 얻을 수 있었다. 18년 전 어쨌든,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었고 무척 힘들고 피곤했지만, 애초에 엄두도 못 낼 정도는 아니었다.


18년 전의 대학생의 모습은 오늘날에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장면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 학생은 18년 전의 대학 교육을 지금은 받을 수 없다. 트럭 운전사, 농부, 청소 노동자, 택시 기사들은 미국에서 아마 가장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녀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기는 너무 어려워졌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 4년제 대학교 등록금은 3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올랐다.


2019년 고등교육진흥기관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평균적인 주립대학에 다니려면 저소득층 집안 출신 학생들은 8만 달러 정도를 빚을 내야 한다. 

미국에서 가장 학비가 싼 축에 속하는 브리검영 대학교도 등록금이 두 배 이상 올랐다.


펠 그랜트 장학금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생생히 알려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등록금도, 집값도 너무 올라서 펠 그랜트 장학금만 받아서는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 50년 전 처음 장학금 제도가 마련됐을 때만 해도 펠 그랜트는 4년제 대학에 다니는 데 드는 비용의 79%를 지원했다. 


오늘날 그 비중은 29%로 낮아졌다. 여전히 좋은 제도지만, 학업에만 몰두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금액이 된 셈이다. 

그래서 장학금 덕분에 가졌던 경제적 안정, 마음의 평안, 사치로 여겨지던 삶의 진로에 관한 고민 모두가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오늘날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고 있다. 

교육만이 희망이라고, 대학 학위만 있으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에 책임지는 이는 정작 없다. 오늘날 가족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대학 교육을 받으라는 것은 엄청난 빚더미에 앉으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을 받고 난 뒤, 과연 얼마나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서 돈을 벌 수 있을지 또한 어마어마한 학자금은 언제 갚을 수 있을지는 갈수록 불확실하다. 그 사실을 조언하는 이도 듣는 학생도 이미 다 안다. 


최근 들어 사회와 정치를 모두 병들게 한 거대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성공의 비결을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나 끈기처럼 개인의 문제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외부적인 요인이 어쩌면 더 중요한데 이를 늘 간과한다. 18년전 대학생일 때는 팰그랜트받고 아르바이트 하나 하면 충분히 대학 생활을 할 수 있는 분명 좋은 시절이었다. 


펠 그랜트 장학금은 학생이 넘어지고 무너졌을 때 국가가 늘 굳세게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육에도 그런 버팀목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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