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미국 남부 정신의 본향 '조지아'

김용일 기자

미국 동부의 95번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는 플로리다 최남단에서 북동부 끝 메인주에 이르는 약 3,100km 길이의 동부 종단고속도로다. 이 95번 고속도로를 타고 남부 조지아주 경계에 도달하면 ‘Welcome to Georgia On My Mind’ 라고 씌워진 대형 입간판이 방문자들을 맞는다. 재즈의 거장 레이 찰스(Ray Charles)의 대표곡인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는 조지아주의 상징이자 주가(州歌)이다. 저음에 탁음, 그리고 흑인 특유의 금속성 음색이 어우러진 영혼의 울림 같은 노래다.


레이 찰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리고 ‘소울(Soul)’의 본향 조지아.

미국 남부를 상징하는 ‘딥 사우스’의 주축이기도 한 조지아는 대영 독립전쟁에 참여한 13개 식민지 중의 하나이다. 면적 153,909㎢로 남한 땅의 1.5배 가량 크기다.


조지아라는 이름은 1세기 영국 왕립 식민지가 되면서 당시 영국 국왕 조지 2세에서 유래했다. 16세기 중엽 조지아 지역에 첫발을 디딘 유럽국은 역시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의 탐사대는 먼저 탐험했던 프랑스와 토착 인디언들을 제압한 뒤 깃발을 꽂았지만, 18세기 초반 영국에 굴복해 조지아는 영국 식민지로 자리매김했다.


조지아는 같은 식민지 가운데서도 버지니아 등과 함께 영국에 충성하는 왕당파의 입김이 거센 곳이었다. 그러나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발발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독립전쟁 대열에 가세했다.


1775년 4월, 매사추세츠에서의 첫 전투로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과 함께 조지아에서도 항쟁의 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776년 2월, 식민지인들로부터 압박을 느낀 영국 왕실 임명의 조지아 총독은 인근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으로 달아났다. 조지아의 독립파들은 임시정부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대영 투쟁에 들어갔다.


1776년 3월, 영국군이 사바나 항구에서 쌀을 탈취하려는 과정에서 마침내 충돌이 빚어졌다. 하지만 전반적인 전황은 조지아가 밀리는 형국이었다. 1778년 2월, 사바나를 완전히 장악한 영국은 대륙군과 프랑스 연합군의 도전을 물리치면서 1782년 여름까지 사바나의 지배권을 놓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잇달았다. 기본적으로 조지아는 독립전쟁의 주요 전장은 아니었다. 이 지역을 장악한 영국군도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거점 확보만 하고 있을 뿐, 조지아 내륙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남북전쟁 발발 직전에 링컨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노예 해방이 현실화하자, 당시 조셉 브라운 조지아 주지사는 미합중국으로부터 이탈을 도모했다. 마침내 1861년 1월, 조지아는 다섯 번째로 연방을 탈퇴하는 주가 됐다. 일찍부터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면화를 재배하면서 노예 노동력에 기초했던 조지아는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확실하게 반연방의 노선을 택했다.


조지아의 남군은 초기에는 북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이후 윌리엄 셔먼 장군이 이끄는 북군에 패퇴해 애틀란타를 점령당했다. 셔먼의 북군은 이후 조지아를 종횡하면서 공공 및 산업시설, 철도 등을 파괴했고 동시에 노예 해방을 시행, 수많은 노예가 지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됐다. 해방된 노예들 가운데 일부는 북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1870년 다시금 합중국의 일원이 된 조지아는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다. 주의 간판 농산물이었던 면화 재배는 북동부 지역에서의 면직 기술 발달로 수요가 급증해 조지아는 미국 내 최대 원료 공급처 가운데 하나가 됐다. 조지아는 면화 외에도 담배, 땅콩 등의 생산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남군의 일원으로서 패퇴하고 다시금 합중국에 합류했지만, 조지아는 전형적인 노예주로서의 성향을 벗기 어려웠다.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기반으로 하는 백인 지주 중심의 공화당은 흑인 주민들을 정부와 정치에 대한 참여를 배제했다. 당시 조지아 주민수 가운데 흑인은 30%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투표에 있어 제대로 된 유권자 대우를 못 받았다. 백인은 각각 1표였지만, 흑인은 3명이 1표로 간주됐다.


조지아는 제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국방, 군수 산업의 주요 본거지로 성장했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주민의 인식과 사회적 제도는 여전했다. 1954년, 연방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흑백 분리는 비헌법적이라고 판결했지만,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전용 학교에 입학이 허용된 것은 불과 60여 년 전인 1961년부터였다. 조지아는 2003년에 이르러서야 노예제를 상징한다는 지적을 받았던 주기(州旗)의 디자인을 바꾸는 등 남북전쟁 후 100년 이상이 지나서야 겨우 ‘남군의 때’를 벗었다.


현재의 조지아는 플로리다와 더불어 남부의 주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 센서스 기준으로 818만 명을 넘어서 인구 기준으로 미국 내 10위권이다. 무엇보다 조지아는 남동부를 아우르는 교통과 물류의 허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델타항공과 코카콜라, 홈디포, UPS의 본사가 주도인 애틀란타에 있다. 또 뉴스전문네트워크 CNN이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 해군잠수함 기지를 비롯해 많은 군사기지가 조지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 들어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기아 자동차를 필두로 한 한국 자동차 생산공장의 진출이다. 2022년 기준 연간 34만 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기아 조지아공장은 한국 자동차와 한국의 위상을 한껏 끌어 올렸다. 현지 공장이 들어선 웨스트포인트의 시장은 기아 자동차공장의 유치가 결정되자 종탑에 달려가 기쁨의 타종을 했고, 현지 주민 하나는 “주님, 기아자동차를 우리 마을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표지판을 내걸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미국 내 손꼽히는 교통, 물류의 요지답게 조지아에는 전국 각처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는 ‘부밍 스테이트(Booming State)’이기도 하다. 한인들 역시 주택 가격과 음식값이 싸고, 기후가 온화하며 무엇보다 유입 인구의 증가로 비즈니스가 활발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조지아로 이주가 늘고 있다.


조지아는 ‘딥 다우스’ 특유의 보수 성향이 강한 전형적인 ‘레드 스테이트’였다. 1992년 클린턴이 당시 부시 대통령에게 신승했던 것을 제외하고 이후에 줄곧 공화당 후보만을 선택해 왔다. 그러나 2020년 대선 때 공화당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바이든이 트럼프를 0.23% 포인트, 투표수로는 1만 6,000여 표 차이로 꺾고 조지아를 거머쥔 것이다. 텃밭을 놓친 트럼프는 분노를 못 감췄고, 그 과정에서 주정부의 선거 주무장관에게 “1만6,000표를 찾아내 뒤집으라”라는 압박을 가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트럼프의 이같은 행태는 조지아 검찰에 의해 선거방해 등 각종 죄목으로 기소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형사재판에 서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지아 외에도 뉴욕, 연방특검 등으로 부터 모두 4건에 기소된 트럼프는 재도전에 나서기는 했지만 결과를 장담키 어려운 사법 리스크에 고삐를 잡힌 형국이다.


이 지역 한인들의 주요 거주이기도 한 애틀랜타 외곽의 귀넷, 데캅 카운티 등은 전형적인 여촌야도의 성향을 보이면서 조지아의 변신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남부의 하버드로 불리는 에모리 대학, 그리고 남부의 명문 공대 조지아텍이 애틀랜타에 자리잡고 있다.


애틀랜타 시가지는 스트리트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주점과 업소들이 많이 있다. 호텔 등지의 로비에서는 다른 지역과 차이가 느껴질 만큼, 제대로 차려입고 한껏 멋을 낸 흑인 멋쟁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흑인 인구 비율은 전체의 30%에 달할 정도다. 어둡고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을 떨쳐낸, 재즈와 소울의 후예들이 약진하고 있는 신흥주가 바로 조지아다.

Comments


Commenting has been turned off.
bottom of page